임진왜란,정유재란에 김안방을 비롯한 해남 산이 향우들과 의병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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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방과 그의 종제인 金安宇는 해상의병으로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 였다고 한다.
이들은 명량대첩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白振南‧ 金聲遠‧ 文英 凱‧ 邊弘遠‧ 金擇南‧ 任永凱 등 10여인과
함께 避亂船을 구축하여 강을 막고 후진 을 구축하였고 군량미
와 군장비 및 의복 등을 조달하였으며 명량의 요충지인 우수영
울돌목에서 쇠줄을 바닷물 속에 가라 앉혀 적선을 침몰시키기
도 하였 다고 전해진다-김진택-고문서집성 67~73P 인용-

[전라의병 전주성,남원성집결 총10만명]
1.전라의병총대장(의병사령관) 1대창의사 고경명.(장흥,곡성,담양)-병력수 10만명.
경남고성 왜군상륙작전을저지시킨 최초의병장,
금산이치전투의병총지휘 6,000명전사/고경명전사.
왜군1만5천명도 심각한타격을입어 무주,상주,거창으로퇴각시켰다.
2.전라의병총부대장(의병 부사령관) 부창의사 양대박.-병력수 10만명.
임실 슬치전투 의병 총지휘로 진안 성수,월평산성,슬치,관촌 성미산성,신덕,신평등에서
소조총융경(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6군을격퇴하여 전주성을사수하였다.
3.전라의병장 지장군.
임실 슬치전투로 패주하는적을 성수 월평산성에 군량미를쌓아놓고,슬치,신평,신덕등에서
왜군을격퇴하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때 이곳을거쳐 남하하였다.
4.전라의병총대장 2대창의사 김천일
나주출신으로 담양부사로있다가 전라의병총대장 창의사 고경명이죽자,
전라의병총대장 창의사로임명되었다.
진주대첩(김시민)과 행주대첩(권율)에 참가하여 김시민,권율과함께승전의주역이되었다.
진주성2차전투에 전라의병총대장 창의사로임명되어 전라도관군과
의병2만7천을이끌고 우도절제사(총사령관)가되어 왜군8만을상대하였다.
진주대첩에서 김시민의관직이 가장높았기때문에 김시민의이름이 많이알려진것이다.
행주대첩도 권율이 광주목사,전라도순찰사로 관직이 가장높았기때문에
담양부사였던 김천일의이름이 알려지지않았던것이다.
진주성2차전투에서 우도절제사.전라의병총대장 창의사가되어
2만7천명의 전라관군과의병들을이끌고 진주성에서
왜군 초10만명중 8만을상대하다다가 패전하게되자, 촉석루에서 아들 김상건을끌어앉고
왜군의칼에 죽을수없다며 투신자살하였다.
이로부터 종사 양산숙,군관 조인호,해남의병장 임희진,임달영(임희진아들)등
수많은 관군과의병들이 북향재배한후 남강에뛰어들어 투신자살하였다.
임희진아들 임달영은 여기에서 살아남는다.
5.해남의병장 임희진(전투대장),임달영(전투부대장/훗날 의병활동으로 당상관 정3품첨지에오름)
해남에서 의병500명을모아 아들 임달영과함께 진주성2차전투에참가한다.
김천일이 촉석루에서 아들 김상건을 끌어앉고 투신하자,
아들 임달영과함께 투신하였으나 임달영은 살아남았다.
임달영은 부친의시신을 찾지못하자 유품을건져 해남군 송지면 삼마동에 장사지내고,
동생 임준영과함께 의병활동을 대대적으로전개하여,혁혁한공을세우게된다.
이 사실이알려져 선조는 정3품 당상관 첨지벼슬을 제수한다.
공로가 유독혁혁하여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5,주논개.
주논개의 남편은 장수현감 최경회였다.
장수현감 최경회는 진안웅치(장승면 곰티재/모래재)전투에서 전주성으로향하던 왜군을 격퇴하여
전주성방어에 성공적으로막아낸 관군장수였다.
금산이치,진안웅치,임실슬치전투이후, 전라도관군과 의병들은 남원성으로집결하여
왜군의 북상을 저지시키기위하여 집결해있었다.
이후 김면,김시민병력,장윤(정인홍병력)과협공하여,
거창사랑암,성주전투에서 왜군을격파하고
성주성을차지한 왜군을1개월간공격하여 몰아내고 성주성을탈환하였다.
왜군이 진주성으로 8만이 공격해올것이라는 첩보가입수되자,
선조는 곽재우에게 진주성사수명령을 하달하게된다.
(1595년 진주목사 곽재우는사임하고나감)
진주성을지키던 진주성 신임목사 서예원등은 달아나려고하였다.
진주성병력과 곽재우병력 2천명이 창령 하왕산으로 병력을빼내어 이탈하자,
신임 진주목사 서예원등도 이탈하려하였다.
곽재우는 유격전략으로 싸우려하였고,이것은 결과적으로 선조의명령을 거부한것이되었다.
남원성에있던 전라관군과 의병들이 선조의명을받아 진주성으로 들어가게되었다.
김해부사 이종인(전라출신)이 이탈하려는 진주목사 서예원,거제현령 김준민,
감포현령 송제화,해미현감 정명세,진주판관 성수경등을 강제로억류시키고 붙잡아두게된다.
진주성이 비게되자,
선조는 남원성에 집결해있던 5만명중 절반을빼내 전라도 관군과 의병 2만7천여명을 진주성으로들어가
싸우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경상도병마절도사겸 진주성좌도절제사 최경회는 진주성좌도에서 전라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는
진주성 좌도절제사(부사령관)로임명된다.
최경회는 왜군과 전투중에 진주성 좌도에서 전사하였다.
주논개는 총사령관 창의사 김천일이 촉석루에 투신한 소식을듣고,
진주성좌도에서 우도로피신하여 최경회전사 소식을듣고 촉석루에서 왜장 로쿠스케를
촉석루로유인하여 가락지를 낀 손으로 끌어앉고 투신하였다.
진주성 2차전투에서 전라관군과 의병2만7천이 희생되거나 남강을헤엄쳐 탈출하여
하동에서 남원의병장 변사정,임계영이 수습하고 왜군의 북상을 막아냈다.
6.고종후- 전라의병총대장 1대창의사 고경명장군의아들. 복수대장.
복수의병대장 고종후는 아버지를따라 금산이치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금산전투를 치루고나서 남원성에서 진주성2차전투에 참가하게된다.
우도절제사 김천일,좌도절제사 최경회에이어 서열 4위급인 복수대장에 임명되었다.
적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는곳에 투입되는 선봉대장이 복수대장이었다.
8박9일간의 전투중 거제현령 김준민이 전투부대장급으로 첫전사를하자, 성문을열고나가
기마대를이끌고 왜군에 돌진하다가 전사하였다.
7.처영스님-승병장.(김제 금산사주지)
처영스님은 서산대사 휴정의제자로 김제 금산사주지였다.
전라도순찰사권율, 전라의병장 김천일등과함게 전주성에서
승병1천명을이끌고 행주산성으로들어가 행주대첩을치뤘다.
전라관군,의병2,800명중에서 1천명은 처영이이끄는 승병이었다.
전주성에 집결해있었던 10만명의 의병중에서 활과 총통을 잘쏘는 사수2천명을선발하여
처영스님이이끄는 승병과함께 행주산성으로들어가 왜군3만을상대하였다.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높은고지를선점하여 사수들을 집중배치하고,
관성을이용하여 활을쏴서 왜군을 섬멸시켰다.
행주에서 왜군1만5천명이 섬멸되었다.
조선군,의병,승병사상자수는 130여명 중대병력에 지나지않았다.
8.김면 -고령의병장(유학자)
김면은 경북 고령출신으로 유학자였다.
왜군이 진주성으로 쳐들어온다고하자 판관 김시민은 진주목사 이경과함께 진주성민을데리고
지리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이경이 지리산에서 병사하자,
김시민이 대리목사로임명되었다.
김성일과 김시민은 진주성민을데리고 진주성으로 돌아가 전쟁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김면이 진주성으로들어왔다.
이후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금산전투에서 퇴각하는 왜군을치자고 건의하였다.
김시민이 이뜻을 받아들이자 김면은 고령,거창으로가서 의병700명을모집하여
김시민이보낸 장윤병력200명과함께 최경회의병군을도와 거창의사랑암에서 왜군을격퇴시켰다.
그후 왜군이 성주성으로 달아나서 차지하자,
장수현감을지낸 남원부사 최경회가이끄는 관군과 의병에게 지원을요청하고,
사천현감 장윤이이끄는 병력과 합세하여,
성주성으로들어가 웅거하는왜군을 한달동안 공격하고 격퇴시켜
왜군이 성주성을버리고 달아나게만들어 성주성을탈환하였다.
이공으로 의병대장 김면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종2품)로임명되었다.
성주전투10개월후 산속전선에서 병을얻어 병사하였다.
9.장윤-전라좌의병부장.순천/승주부사.순천 승주출생.
순성장 장윤은 임진왜란시 사천현감이되어 진주성1차전투를치루고 순천/승주부사로
임명되었다. 그후 진주성1,2차전투에참여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겸 진주성좌도절제사 최경회의부관 순성장이되었다.
순성장은 최경회가 전사하였을때 그지휘를이어받는 자리였다.
장윤은 문관급제에 실패하자 1582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발포만호(鉢浦 萬戶/고흥)가되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쇄신할 방책인 결백론(潔白論)을 주장하였다가
상관의미움을사서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둔생활을하였다.
그후 호남 주기학파 영의정 박순,성혼등이 권력을장악하자 1588년에 선전관으로 복귀하여
훈련원정을거쳐 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의병을일으켜 전라좌의병부장이되었다.
남원부사 최경회,고령유학자 김면등과함께
성주성전투에 참가하여 성산,개령등지에서 왜군을격퇴하고 성주성을탈환하였다.
한때 정인홍 의병부대와함께 활동하며 의병을이끈적도있으나,
진주성에 최후까지남아 최경회부장으로활동하며 진주성2차전투에서
왜군과싸우다가 경상도병마절도사겸 진주성좌도절제사 최경회가전사하자
정3품 순천,승주부사겸 순성장 장윤이 그자리를대신하였으나 얼마버티지못하고
황진(남원) 충청도병마절사(도순성장)등과함께 왜군의 총탄에 전사하고말았다.
1593년음력6월22~29일 진주성 제2차전투에서 순성장이자 진주성 임시목사 장윤이 전사한후
충의공에 봉해졌으며,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장윤을기리는 "장윤정려"는 시도기념물75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에 1649년에 경상도관찰사 정사호가 정충사를 건립하였고,
진주 창렬사에 그의넋을 배향하였다.
진짜 의병은 이런분들이 진짜 관의병일것이다.
선조,광해군의 명을거부하고 진주성을버리고 이탈한 관의병들은 할말이없을것이다.
명궁사수였던 장윤은 왜군에게 대충 화살을날려도 백발백중으로
명중시켰다고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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