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지 수문장의 흔적을 찾아서

  







해남군 산이면 노송정에 모시고 있는 김선지 할아버지는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신 이순신, 원균 휘하의 장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김선지는 宣傳官에 재직 중이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의주 용만까지 호위하였으며 그 공으로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 곡포만호에 1592년에 임명되신다

여러 전투에서 공이 커서

1593년 전력부위 수문장에 임명되시고 좌부장,보성군수까지

승진하셨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의 실책과 이순신 장군의 불신임으로 인하여

그 휘하 장수들까지 좋게 보지 못하셨다

명랑해전에 참여한 장수 중

곡포보가 속한 미조항진 첨사 김응함의 휘하로 예상되는 바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의 자료에는 대외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수문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공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족보와 임명서류와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된 것으로 

임진왜란의 수군 전투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부터 1597년 12월 27일

노량해전에서 28세에 전사하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족보에는 정유년 12월에 전사하셨다고 하는데

노량해전은 무술년 1598년 12월로 차이가 있다)

  

 


1570110

1588- 3921선조 21년 무자(19) 권무과 임시무과에 급제

  =1592-3925년 선조 25년 임진년 선전관으로 공을 쌓아 곡포만호에 특제되셨다

 

곡포만호 충무 이순신 충장 정운 (사도)첨사김완 연승대첩

=곡포보(김선지만호)는 미조항진(첨사김응함)에 속하고 경상우수사(원균)에 속해

  만호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셨지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다

  

1593년 선조 26년 전력부위 수문장 임명

萬曆21(1593)4월 모일에 兵曹에서 曲浦萬戶金銑之(1570~97)에게 내린 告身이다. 같은 달 초6일에 내려진 宣祖(재위 1568~1608)의 명을 받들어 展力副尉守門將에 임명한 내용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김선지는 宣傳官에 재직 중이었다. 곧 곡포만호에 임명되어 이순신(1545~98)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렇게 세운 軍功으로 賞職을 받은 것이 본 고신의 내용이다. 9展力副尉에 오르고 守門將에 임명되었는데, 이를 超敍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단계를 뛰어넘은 특진인 모양이다. 수문장은 西班 4품 이상 중에서 추천을 통해 임명되었는데 당초 20인이었던 것이 왜란 당시에는 430인에 이르기도 하였다.

 

1595년 을미(乙未)년 선조 28년 단기 3928년 좌부장 위 수문장

족보에는 을미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고신서류와 차이가 있다

萬曆31(1603)9월 모일에 兵曹에서 守門將金銑之(1570~97)에게 내린 告身이다. 무려 4년 전인 만력27(1599)222일에 내려진 宣祖(재위 1568~1608)의 명을 받들어 軍功으로 賞職 秉節校尉龍驤衛左部將을 내린 임명장이다.

본 고신이 발급된 1603년은 모두 그의 死後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병조에서 빈 임명장을 전달하는 것으로 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兵曹, 萬曆二十七年二月

二十二日,

, 守門將金鎭之,

·

部將者.

軍功賞職.

萬曆三十一年九月日.

參議臣尹[着名]

判書參判 正郞

參知 佐郞臣李[着名]

 

 

1597-3930년 선조 30년 정유 1227일 군의 공을 인정해서 보성군수 승배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여 초혼장을 하였다

족보에서 정유년(1587)에 표기하셨는데 노량해전은 1598년 무술년으로 차이가 있다 (정유재란)

 宣武原從功臣錄卷 二等

=43번 만호 김선지 

 

명량대첩 경상 우도 수영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배설은 회전 직전 도주.

미조항 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 - 전선 1(일기)=곡포만호 포함가능성

영등포 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 전선 1(일기 / 선조 실록[32])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 - 전선 1(일기)

거제 현령 안위(安衛) - 전선 1(일기 / 선조 실록)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 - 전선 1(일기) =곡포만호 포함가능성

 

칠천량 해전에서 입은 조선 수군의 피해 중

경상우수영 수군 진포

미조항 첨사 김응함 참전 생존(이하, 배설을 따라 탈출, 도주)

평산포 만호진(代將) 정응두 참전 생존

 미조항진에 파견된 수군첨사는 남해·상주포·사량·당포 등지를 관할하였다(중종실록)

곡포보성은 경상우수영의 속진인 미조항진에 상주포와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

경상우수영 관하의 4­영등포(永登浦)상주포(尙州浦)곡포(曲浦)풍덕포(豊德浦이 이에 해당된다.

(곡포만호전력부위 수문장 만호 김선지 노량해전까지 생존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

미조항 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의 휘하에

수문장 만호 김선지로 노량해전까지 참전하시다가 전사하셔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만호로 녹훈되신 것으로 추정되며

원균과 김응함의 나쁜 이미지에 의해 전공이 가려져 있다고 추정됩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원균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읽을 수 있고

명량대첩의 중군장 김응함은 노량해전에서도 전공을 세우지만

선조의 의심을 받으며 실록 등 인정을 받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또한 원균의 친척인 윤두서의 추천으로 보성군수로 추천되는 등 남인 계열로 볼 수 있어 당쟁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윤두서는 인척인 원균이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며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난중일기 중에서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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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pixel, 세로 2pixel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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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신유) 맑다. [양력 611]

겸 삼도순변사의 공문과 우수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宋 漢連)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미조 항첨사(김승룡)상주포곡포평산포만호(김축)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함부로 벌써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322일 이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신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元 均)은 패군한 뒤로 군사없는 장수이니, 별로 지휘할 것이 없거니와,

 

 

5월 초3(경진) 맑다. [양력 620]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장흥부사와 발포 만호가 와서 봤다.

군량명세서와 공명고신(이름이 안 적힌 사령 장) 삼백 여 장()과 임금의 분부 두 통이 내려왔다.

 

 

620(병진) 맑다. [양력 715]

어제 아침 곡포권관 장후완(蔣後琓)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 포만호에게 진작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할 적에, 기 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여 일이나 물리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 해괴하기 짝이 없어 곤장 서른 대를 쳤다. 바로 이 날 오정에 남해현령이 들어와서 숙배한 뒤에 이야기하고 서 활을 쏘았다.

 

818(병자) 맑다. [양력 928]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승전한 함대를 몰고 전라도의 서해안인 당사도唐沙島법성포法聖浦칠산七山 바다를 순시했다. 그동안 승전을 축하하는 백성들에게서 군량과 동복을 얻고 각 읍 각 진에 있는 군기도 취득하였다. 민선 중에서도 크고 튼튼한 배를 무장해 병선에 편입했다. 난민 중 재용지사를 권유하여 군사도 장정 500여인을 더 얻었다. 이순신의 휘하 장졸은 간 곳마다 백성들의 눈물겨운 환영을 받아 의용지기를 더욱 양성하였다. 또한 의용단을 설립하여 순신을 따르려는 장사들도 많이 생겼다.

출처 : 더스쿠프(https://www.thescoop.co.kr)

 

 

칠천량 해전에서 입은 조선 수군의 피해

정유년 1597년 마지막 전투로 미조항 첨사 김응함을 알수 있으며

경상우수영 수군 진포

미조항 첨사 김응함 참전 생존(이하, 배설을 따라 탈출, 도주)

미조진성은 고려 때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크기는 둘레 644m, 높이3.3m이다. 임진왜란 때 싸움배인 전선(戰船)1, 병선(兵船) 1, 척후용 배인 사후선이 1척이 배치되었고, 장졸 233명이 배속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첨사 김승룡(金勝龍), 중기에는 성윤문(成允文), 후기에는 김응성(金應誠)이 충무공 예하에서 참전했다.

 

영등포 만호 조계종 참전 생존

안골포 만호 우수 참전 생존

제포 만호 주의수 참전 생존

당포 만호 안이명 참전 생존

조라포 만호 정공청 참전 생존

적량 만호 ? 참전 생존

웅포 만호 ? 참전 생존

평산포 만호진(代將) 정응두 참전 생존

상주포 만호

곡포권관 변익성

소비포 권관진

옥포 만호 ? 참전 및 생존 (선조실록 30.7.22 선전관 김식의 장계)

 

 

 

 

  

1572(선조5)학생 김연수를 기자전참봉에 임명하는 문서.

隆慶6(1572)1222일에 平安府 觀察使學生 金延壽箕子殿 參奉에 임명한 差帖이다. 문서 앞부분이 결락되었으나 기자전이 분명히 확인되고, 着官使가 보이므로 평양부 관찰사가 내린 문서임을 알 수 있다. 기자전은 고려조 110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崇儒정책에 힘입어 존숭되어 世宗때에 廟庭碑를 세우고 참봉2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참봉은 종9품의 말단직이므로 告身이 아니라 差帖이 발급되었다.

김연수는 戊午士禍( 1498)被禍金馹孫(1464~1498)의 형 金驥孫의 증손이다.

1572(선조5)학생(學生) 김연수(金延壽: 1532~1588)를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기자전은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중국 은()나라의 왕족이자 충신으로 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여 유민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가 한반도로 옮겨와 기자조선(箕子朝鮮)를 세웠다는 설이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믿어졌기 때문에 제향(祭享)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참봉은 종9품의 미관말직이었으므로 왕명이나 왕의 재가없이 수령이 직권으로 임명하는 본 임명장이 발급되었다

 

김안방(1554~1638)은 중봉 조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이 집현전 교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렀고, 정유재란 때는 김성원, 백진남, 종제 김안우와 함께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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